8월 2일, Fred와 나는 파리를 떠나 일본으로 향했다. 다음 날 우리는 Fred의 무대 표현 코치인 Yumi Saitō가 사는 가나자와에 도착했다. 8월 4일이 되자 팀 전체가 합류했다. 이번에는 정말로 전부였다. 보컬리스트, 뮤지션, 사운드 엔지니어, 프로젝트를 둘러싼 사람들까지. 프랑스에서 이미 두 차례 함께 모인 적은 있었지만, 이렇게 완전한 구성으로 한자리에 모인 것은 처음이었다.

그리고 가나자와에서 무언가가 달라졌다.

물론 일은 했다. 아주 많이 했다. 하지만 정확히 언제부터 일이었고 언제부터 일이 아니었는지를 구분하기는 어려웠다. 식사 중에도, 거리에서도, 저녁에도 대화는 계속됐고, 때로는 아주 늦은 밤까지 이어졌다. 농담을 하거나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다가도 누군가 갑자기 “이건 한번 해보면 어때?”라고 던졌다. 그러면 한 아이디어가 또 다른 아이디어를 낳고, 누군가 받아 이어가고, 다시 작업이 시작됐다.

우리는 정말 조금밖에 자지 않았다.

나는 가능한 한 여행을 미리 준비해 두었다. 그런데 창작 에너지가 한꺼번에 폭발하는 팀을 정리한다는 것이 때로는 곡예와 비슷하다는 사실을 금방 깨달았다. 모든 것이 동시에 튀어나왔다. 해야 할 일은 그 에너지를 꺾지 않으면서도 방향을 잃지 않게 하는 것이었다. 장난스럽고, 때로는 솔직히 말해 꽤 혼란스러웠지만, 동시에 놀랄 만큼 진지하게 몰입한 시간이었다.

Fred가 가장 크게 깨달은 것은 팀이 어느새 어떤 존재가 되어 있었는가 하는 점이었다. 처음으로 그는 뮤지션까지 포함한 전체 팀이 자신을 둘러싸고 한자리에 있는 모습을 봤다. 어떤 사람들은 이미 무대 경험이 충분하고, 어떤 사람들은 더 안정된 다른 프로젝트를 선택할 수도 있다. 그런데도 모두 여기에 있다. 이 프로젝트를 믿고, 여기서 하는 일을 좋아하고, 계속 함께하기를 선택한다.

“가나자와에서 문득 생각했어. 우리는 더 이상 그냥 팀이 아니구나. 가족이 되어 있었구나.”

이 글에 실린 사진에 대해서도 한 가지 밝혀두고 싶다. 여행 중 만났거나 함께 있었던 사적인 인물들을 존중하기 위해 우리는 개인 사진을 공개하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훨씬 현실적인 이유도 하나 있다. Fred가 여행 중 찍었던 사진이 모두 들어 있던 휴대전화를 잃어버렸다. 그래서 여기에는 우리의 여정을 지나온 몇몇 장소의 모습만을 담았다.

가나자와, 바라보는 법을 배우는 곳

Fred는 가나자와를 바로 좋아했다. 도쿄나 나중에 만나게 될 서울보다 훨씬 인간적인 규모로 느껴졌다고 했다. 역사 지구, 박물관, 거리, 도시 자체가 그의 머릿속에 수많은 이미지를 남겼다.

하지만 사람들과의 만남도 그만큼 중요했다. Fred는 Yumi의 가족을 만났고, 여행 중 일본인 팀원들의 여러 가족과도 만나게 됐다. 그중 한 말이 특히 그에게 깊게 남았다. 프랑스어권 아티스트들은 보통 자신의 프랑스 노래를 들고 일본에 온다. 하지만 FRED의 접근은 다르다는 이야기였다. 레퍼토리는 프랑스어에서 태어나지만, 일본어나 한국어로 갈 때 목표는 가사를 단순히 번역하는 데 있지 않다. 같은 감정의 핵심이 다른 언어와 다른 문화 안에서 어떻게 살아갈 수 있는지를 찾는 것이다.

Fred는 언제나 어느 정도의 어색함과 부족함은 피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일본인도 한국인도 아니며, 그렇게 보이려 하지도 않는다. 흥미롭게도 여러 사람은 바로 그 한계를 숨기지 않는 태도에서 진정성을 느꼈다. 글을 쓰는 사람의 정체를 지우는 것이 아니라, 원래의 프랑스 노래가 모든 것을 그대로 유지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만큼 충분한 존중을 가지고 다른 문화로 다가가는 것이다.

일본 전체가 그런 감각을 더해 주었다. 가나자와, 도쿄, 교토, 그리고 한국으로 떠나기 전의 오사카. 거리, 냄새, 소리, 일상의 장면, 언젠가 노래 안에서 바로 알아볼 수 있을지는 모르는 아주 작은 것들. Fred는 그런 것들을 씨앗이라고 부른다. 어떤 씨앗은 몇 주 뒤에 싹을 틔울 수도 있고, 어떤 것은 몇 년 뒤에야 모습을 드러낼지 모른다.

오사카 역시 강한 인상을 남겼다. 몇 가지 면에서는 Fred가 도쿄보다 더 좋아했다. 유럽인의 눈에는 여전히 엄청나게 큰 도시지만 조금 더 다가가기 쉬웠고, 상점가가 활기찼으며, 무엇보다 합리적인 식사 절제라는 개념을 아주 손쉽게 잊게 만드는 도시였다. 이 점에서만큼은 팀 누구도 별로 절제하지 못했다.

무대를 이해하기 시작한 두 번의 만남

일본 일정에는 프랑스 문화센터에서 열린 두 번의 작은 공연 겸 만남도 있었다. 하나는 도쿄에서, 다른 하나는 교토 근처 간사이에서였다. 매번 약 100명 정도가 함께했고, 주로 중·고등학교나 대학교, 또는 문화센터 프로그램을 통해 프랑스어를 배우는 학생들이었다.

우리는 장소마다 다른 프로그램으로 약 열 곡씩 준비했다. 어떤 곡은 Fred가 혼자 불렀고, 듀엣으로 만들어진 곡에서는 Min-Ah Seo와 Akiko Tanaka가 함께했다. 다른 보컬리스트와 코러스, 뮤지션들도 모두 함께했다.

Fred에게 이 두 자리는 무엇보다 실제 관객과 처음 제대로 마주한 경험이었다. 그는 무대가 자신을 불편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숨긴 적이 없다. 이 만남들은 그가 무대에서의 감각을 잡는 데 도움이 됐고, 동시에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 한 명의 가수가 객석 앞에 홀로 서는 전통적인 형식이 자신에게 가장 잘 맞는 방식은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게 했다.

학생들과의 대화는 공연 자체만큼 중요했을지도 모른다. 처음부터 호기심을 보인 사람들도 있었고, 처음에는 조금 회의적이었다고 솔직하게 말한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우리가 왜 노래를 번안하는지, 왜 이미지나 문화적 참조가 바뀔 수 있는지, 왜 자매 작품이 직역이 아닌지를 설명하면서 그들의 시선은 달라졌다.

Fred가 남긴 인상은 단순했다. 이 접근의 진심을 제대로 설명하면 무언가가 열린다는 것.

여러 학생이 ‘진정성’을 이야기했다. 어떤 이들은 Fred에게 직접 “진짜로 노래한다”고 말했다. 그 표현은 그에게 깊은 울림을 남겼다.

Akiko는 또 다른 놀라움을 만들었다. 평소 말할 때의 프랑스어는 아직 망설임이 많고, 일상 대화에서는 어떤 학생들이 오히려 더 능숙할 때도 있었다. 그런데 노래를 시작하면 발음에서 거의 억양이 사라졌다. 그 차이에 관객은 크게 놀랐다.

그 모습은 Akiko의 작업 방식을 잘 보여준다. 먼저 노래의 감정 속으로 들어가고, 무엇을 실어야 하는지 이해한 다음, 그 감정 안에 단어를 놓는다.

이 만남들은 오래 이어지는 연결도 남겼다. 일본에서 만난 사람들 가운데 수십 명과 Fred는 지금도 꾸준히 연락한다. 서로 안부를 묻고, 프로젝트를 따라오고, 웹사이트를 보고, 다시 이야기를 건넨다.

그리고 그것은 아직 시작에 불과했다.

서울: 또 다른 규모의 변화

우리는 오사카를 거쳐 8월 12일 일본을 떠나 한국으로 향했다.

한국에서의 일정은 몇 달 전부터 준비돼 있었다. 팀 주변의 여러 인연을 통해 우리는 이미 규모 있는 한일계 레이블과 연락을 주고받고 있었다. 출발 전부터 마스터 음원이 전달됐고 프로젝트 소개도 이루어졌으며, 여러 차례 이야기가 오간 상태였다.

지금은 그 파트너의 이름을 공개하지 않으려 한다. 논의는 진지하게 진행되고 있지만 아직 협의 중이며, 몇몇 세부 사항은 더 정리되어야 한다.

그 파트너는 머무는 동안 스튜디오를 사용할 수 있게 해주었고 서울에서의 콘서트도 직접 준비했다. 한국 일정 후반에는 경영진과 보다 공식적인 미팅도 예정되어 있었다.

그 사실만으로도 한국에서의 시간은 처음부터 다른 차원을 띠었다.

서울 스튜디오에서 스무 곡가량

스튜디오 자체가 Fred에게 큰 인상을 주었다.

스튜디오 작업이 낯설어서가 아니었다. 우리는 프랑스에서도 좋은 환경에서 꾸준히 작업할 수 있는 행운이 있고, 팀은 Kenji와 Daichi와 이미 익숙하게 호흡을 맞추고 있다. Fred를 압도한 것은 오히려 그 장소가 가진 무게였다.

큰 레이블의 시설 안으로 들어가고, 어떤 그룹과 가수들이 바로 그 공간을 지나갔는지 알고, 주위를 둘러보며 “내가 여기서 뭘 하고 있지? 내가 정말 이 자리에 있어도 되는 걸까?”라고 스스로 묻게 되는 경험.

하지만 실제 작업은 금세 아주 구체적인 것으로 돌아왔다.

이미 데모나 상당히 진행된 형태로 존재하던 스무 곡가량을 다시 꺼냈다. 여러 FRED의 세계가 포함돼 있었다. 각 곡의 상태에 따라 더 작업하고, 마무리하고, 녹음하거나 마스터링했다.

우리에게 특히 중요했던 점 하나는 Kenji와 Daichi와 계속 작업하는 것이었다. 레이블의 스튜디오에서도 우리의 방식과 우리의 사운드 엔지니어를 유지할 수 있었다. 현재의 논의가 실제 협업으로 이어진다면 이 연속성은 앞으로도 중요할 것이다.

작업은 보통 오전 9시 무렵 시작해 오후 3시나 4시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그다음에는 또 다른 서울이 기다리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서울을 발견할 때

나에게 한국은 당연히 새로 발견해야 할 나라가 아니었다. 대신 Fred와 팀의 일부가 한국을 돌아다니며 반응하고, 비교하고, 놀라고, 내가 이제는 같은 방식으로 보지 않는 것들 앞에서 멈추는 모습을 지켜보는 일이 즐거웠다.

스튜디오 작업이 끝나면 우리는 밖으로 나갔다. 많이.

서울은 시간을 잊게 만드는 힘이 있다. 밤은 자정, 새벽 한 시나 두 시까지 이어졌고, 때로는 그보다 더 늦어졌다. Fred는 길거리 음식, 식당, 거리, 동네, 밤의 도시를 신나게 받아들였다. 그리고 하루 종일 진지하게 일한 뒤 단 몇 시간 만에 정상적인 수면 계획을 완전히 망가뜨리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다는 사실을 배웠다.

우리는 많이 먹었다.

그리고 많이 마셨다.

비하인드라는 제목의 글이라면 가끔은 솔직해야 한다.

스튜디오 작업이 없는 일요일에는 조금 더 멀리 나가 서울 주변도 돌아보고, 천천히 바라볼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피로는 쌓였지만 현장에서는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흥분과 기대가 연료 역할을 했다.

남산에서의 어느 밤

서울에서 본 수많은 장면 가운데, 이 여행과 떼어놓을 수 없는 하나가 있다.

어느 날 밤 우리는 남산타워에 올랐다.

도시는 아래로 길게 펼쳐져 있었다. Fred는 잠시 그 위에서 서울을 바라보다가 Min-Ah와 나를 돌아봤다.

“집에 온 것 같아. 내가 있어야 할 곳에 있는 것 같아.”

Min-Ah는 울기 시작했다.

더 보탤 말이 없었다.

그 문장은 완전히 즉흥적으로 나왔다. 그리고 이 여행 동안 Fred와 한국 사이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어떤 분석보다 더 잘 설명해 주는 것 같다.

Fred는 오기 전부터 이미 한국을 깊이 좋아했다. 하지만 일본에 느끼는 매혹과는 다른 무언가를 여기서 발견했다.

일본에서 그는 역사와 대비, 아주 엄격하게 정돈된 것에서 갑자기 예측할 수 없는 것, 때로는 믿기 어려울 정도의 엉뚱함으로 넘어가는 그 감각을 좋아한다. 그것은 Fred 자신의 성격 일부와도 닮아 있다. 일본은 그의 호기심과 상상력을 계속 자극한다.

한국에 대해서는 설명이 조금 더 어렵다.

Fred는 ‘익숙함’에 가까운 감각을 말한다.

어떤 상상 속 소속감도 아니고, 자신이 아닌 무엇이 되었다고 주장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어떤 사람들의 태도, 관계의 방식, 신뢰가 생겼을 때 거리가 사라지는 방식이 자신의 깊은 어떤 부분과 맞닿아 있다는 느낌이다.

Fred는 어느 날 내게 일본이 자신에게 ‘첫사랑’과 비슷하다면, 한국은 어쩌면 평생 곁에 둘 무언가를 만나는 감각에 더 가깝다고 말했다.

이 비유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두 나라를 순위 매기는 말이 아니라, 서로 다른 두 방식으로 마음을 건드린다는 뜻이다.

그리고 콘서트가 있었다

한일계 레이블은 체류 기간 중 콘서트도 준비해 두었다.

Fred는 자신이 노래해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다만 규모가 얼마나 갑자기 커질지는 몰랐다.

일본에서 약 100명 앞에 섰던 경험 뒤라서 그는 여전히 꽤 친밀한 규모를 예상하고 있었다.

그런데 공연장에 들어선 순간 약 3,500명의 관객이 눈앞에 있었다. 수용 규모가 약 4,000명인 공간이었다.

100명 앞에서도 무대는 그에게 큰 부담이었다. 여기서는 완전히 다른 세계가 열렸다.

가장 강렬한 순간은 한국어 버전 Prière rouge를 부를 때 찾아왔다. 양쪽의 대형 스크린에는 관객이 따라 부를 수 있도록 가사가 표시됐다.

Fred가 노래를 시작했다.

그리고 후렴이 왔다.

객석이 그 후렴을 함께 불렀다.

수천 개의 목소리가 동시에 울렸다.

Fred는 멈췄다.

가사를 잊어서가 아니었다. 감정이 그를 말 그대로 덮쳐버렸기 때문이다.

다시 시작하려 했다. 관객도 함께 다시 불렀다. 감정은 곧바로 또 밀려왔다. 그는 울고 있었고 거의 노래를 이어갈 수 없었다.

Min-Ah가 특히 과거 trainee 경험을 바탕으로 자연스럽게 이어받아 곡의 후반부 대부분을 이끌었다.

관객은 그가 진정할 때까지 기다릴 수도 있었다.

그런데 정반대로 했다.

계속 노래했다.

마치 그를 떠받치듯이.

나중에 Yumi는 평소의 직설적인 방식으로, 무대에서 그 감정을 다루는 일에는 아직 해야 할 작업이 많다고 Fred에게 분명히 말했다.

그 말이 맞았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부터 우리가 미래의 무대를 어떻게 만들 것인지에 대한 생각도 훨씬 구체적인 의미를 갖기 시작했다.

무대를 다른 방식으로 상상하기

일본의 두 만남에서는 이미 관객이 함께 부를 수 있도록 큰 스크린에 가사를 띄우는 방식을 시험해 보았다.

서울은 그 아이디어가 얼마나 큰 힘을 가질 수 있는지를 확인시켜 주었다.

아직 모든 것은 열려 있지만 방향은 조금씩 보인다. 비교적 비워진 무대 전면에 Fred가 서고, 양쪽 대형 스크린으로 관객이 가사를 따라가며 참여하고, 언젠가는 중앙의 더 큰 화면에 노래와 함께 움직이는 영상이나 은유적 이미지를 보여주는 방식.

정확한 형태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

필요한 수단도 아직 없다.

하지만 이 아이디어는 실제 경험에서 태어났다. 수천 명이 노래를 시작하는 순간 관객은 더 이상 공연을 ‘보는’ 사람만이 아니다. 공연 안으로 들어온다.

그리고 자신의 노래가 때로 통제하기 어려운 감정을 일으키는 Fred 같은 사람에게는, 그 강도를 잃지 않으면서도 노래를 계속할 수 있는 방법을 함께 찾아야 한다.

서울 콘서트는 마지막 곡과 함께 완전히 끝난 것도 아니었다.

공연 뒤에 별도의 프로그램은 없었다. 그런데도 수백 명이 남았다. 우리의 추산으로는 약 300~400명 정도였다.

그 뒤로도 한 시간 반에서 두 시간 가까이 우리는 이야기를 나눴다. 어떤 사람들은 무대 쪽으로 왔고, 우리는 객석으로 내려갔고, 마이크와 질문이 사람들 사이를 오갔다.

3,500명의 공연 뒤에 남은 마지막 장면은 역설적으로 훨씬 단순했다. 그냥 조금 더 머물며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었다.

왜 그곳에서 무언가가 일어나는 걸까?

물론 한 번의 콘서트만으로 답을 낼 수는 없다.

하지만 Fred가 이미 느끼고 있던 어떤 현상과 이어진다. 지금 FRED 프로젝트는 프랑스나 더 넓은 서구권보다 일본과 한국에서 훨씬 더 큰 반응을 얻고 있다.

Fred도 정확한 이유를 안다고 말하지 않는다.

다만 자주 떠오르는 가설은 있다. 프랑스에서 FRED는 수많은 독립 음악 프로젝트 가운데 하나다. 반면 일본과 한국에서는 이 접근이 조금 더 낯설게 보인다. 한 프랑스어권 작가가 자신의 레퍼토리를 들고 오지만, 현지의 언어와 문화와 진짜로 만나기 위해 가사를 다시 작업하는 것을 받아들이는 방식이다.

그것이 호기심을 만든다.

때로는 처음에 경계심도 만든다.

하지만 프로젝트가 설명되면 그 경계는 아주 빠르게 풀리기도 한다.

서울 이후 늘어난 연락과 이미 일본에서 이어지고 있던 관계들은 아주 구체적인 결정에도 영향을 주었다. FRED 웹사이트를 진짜 네 개 언어의 공간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프랑스어는 여전히 중심이 되는 언어다. 영어는 자연스럽게 더 넓은 국제적 창구를 연다. 하지만 일본과 한국의 사람들이 이 프로젝트에 관심을 갖기를 바라면서 정작 그들의 언어로 들어올 완전한 입구를 제공하지 않는 것은 더 이상 맞지 않다고 느꼈다.

그래서 일본어와 한국어는 웹사이트에 덧붙인 장식이 아니다.

실제로 존재하는 사람들과 연결된 언어다.

레이블과의 만남

일정 후반에는 스튜디오를 제공하고 콘서트를 준비한 그 레이블과 보다 공식적인 미팅도 가졌다.

사전 준비의 상당 부분은 내가 맡았다. 팀의 다른 구성원들도 각자의 경력과 인연을 통해 이 연결이 가능하도록 힘을 보탰다.

Fred는 그날을 조금 특별한 방식으로 받아들였다.

시험을 보는 기분이었다고 했다.

첫 번째 담당자, 그다음 책임자, 또 다른 책임자, 그리고 마침내 레이블 경영진까지. 단계가 바뀔 때마다 다음 단계로 넘어갈 자격을 얻은 느낌이었다고 한다.

Min-Ah와 나는 그 뒤에 이런 진행 방식이 이 맥락에서는 특별히 이상한 일이 아니라고 설명했다.

최종적인 반응은 매우 긍정적이었다.

아직 끝나지 않은 협상의 구체적인 내용은 여기서 이야기하지 않겠다.

중요한 것은 다른 데 있다. 상대방이 관심을 보인 지점은 바로 프로젝트의 접근 방식이었다. 프랑스어권 작가가 자신의 작품을 일본어와 한국어로 꾸준히 발전시키면서 실제 문화적 번안까지 시도하는 사례를 많이 알지 못한다고 했다.

누구도 우리에게 동화를 약속하지 않았다.

길은 아마 길 것이다. 어렵고 장애물도 많을 것이다. 젊음을 선호하는 일이 많은 업계에서 Fred의 나이가 모든 것을 더 쉽게 만들어 주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들의 판단으로는 시도해 볼 가치가 있는 모험이었다.

그 말은 Fred가 처음부터 반복해 온 생각과도 잘 맞는다.

“시작한 데까지 끝까지 가고 싶어. 내가 써야 할 것을 쓰고, 내가 남겨야 할 것을 남기고 싶어. 그다음은 어떤 일이 생기든 받아들이면 돼.”

유명해지는 것이 그의 가장 큰 동력은 아니다. 음악만으로 살아갈 수 있다면 물론 놀라운 일일 것이다. 하지만 성공을 이야기할 때 Fred는 곧바로 다른 사람들을 말한다.

자기보다 젊은 사람들.

이 모험을 선택한 사람들.

때로는 다른 곳으로 갈 수도 있는데도 남아 있는 사람들.

언젠가 FRED가 그들에게도 지속 가능한 무언가가 되기를 바란다.

Min-Ah가 안내한 부산

마지막 사흘은 부산에서 보냈다.

그곳에서는 기꺼이 안내자 역할을 Min-Ah에게 넘겼다.

Min-Ah는 자신의 도시에 아주 깊이 애착을 갖고 있고, 부산의 역사를 열정적으로 이야기해 주었다. Fred 말로는 이제 우리 모두 부산 시험을 봐도 될 정도라고 한다.

그건 과장이다.

조금.

Fred는 부산을 무척 좋아했다. 유럽 기준으로는 엄청나게 큰 도시지만, 그의 눈에는 서울이나 도쿄보다 조금 더 숨을 쉴 수 있는 곳으로 느껴졌다. 바다와 해변이 있고, 분위기도 달랐다.

Fred는 Min-Ah의 가족과 하루를 함께 보낼 기회도 가졌다. 그 부분은 의도적으로 사적인 영역에 남겨두고 싶다. 아주 따뜻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는 정도면 충분하다.

우리는 사실 완전히 돌아온 것이 아니다

8월 31일, 우리는 프랑스로 돌아왔다.

진짜 피로는 여기서 기다리고 있었다.

시차, 누적된 수면 부족, 낮에는 일하고 밤의 상당 부분까지 움직였던 몇 주의 시간이 결국 한꺼번에 우리를 따라잡았다.

하지만 공항에서 거창한 작별 장면은 없었다.

우리는 함께 돌아왔다.

그리고 이 글을 쓰는 지금, 우리는 다시 프랑스에서 정기적인 일주일 작업을 위해 모두 모여 있다.

팀은 한동안 이런 방식으로 움직여 왔다. 모두가 실제로 한자리에 모이는 기간이 있고, 그 사이에는 멀리 떨어진 채 일상이 이어진다. 지금의 기술 덕분에 프랑스, 일본, 한국 사이에서 그룹 화상회의, 필요한 사람끼리의 세션, 보컬 작업, 원격 녹음, 거의 매일 이어지는 대화가 가능하다.

가장 큰 적은 결국 시차다.

Fred가 아시아의 누군가와 맞추기 위해 밤에 일할 때도 있고, 반대의 경우도 있다. 내 일의 한 부분은 이런 모든 일정을 그나마 인간적인 생활과 양립할 수 있는 시간표 안에 밀어 넣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여행에서 돌아와 무언가를 멈춘 것이 아니다.

그저 장소만 바꾸었다.

남은 것들

서울 스튜디오를 거친 스무 곡가량이 남았다.

일본에서의 첫 두 번의 공개 무대 경험이 남았다.

3,500명이 있었던 공연장과, 관객이 함께 불렀기 때문에 Fred가 끝까지 부르지 못한 Prière rouge의 후렴이 남았다.

무대를 바라보는 새로운 생각, 그리고 그 안에서 관객이 어떤 자리를 차지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이 남았다.

사람들과의 만남, 아직 열려 있는 전문적인 논의, 일본과 한국의 연락 관계, 그리고 이제 그 언어들이 실제 사람들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네 개 언어가 된 웹사이트가 남았다.

또한 거리, 박물관, 해변, 식사, 너무 짧았던 밤, 소리와 냄새, 그리고 앞으로 어떤 노래가 될지 아직 모르는 수많은 씨앗도 남았다.

그리고 두 문장이 남았다.

가나자와에서 Fred는 완전체로 모인 팀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우리는 가족이야.”

서울 남산에서 그는 도시를 내려다보며 우리에게 말했다.

“여기가 집인 것 같아.”

어쩌면 이 여행 전체는 그 두 문장 사이에 들어 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