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rand sommeil의 시작에서는 표적이 너무 분명하다고 생각하기 쉽다.

다른 사람들.

눈을 화면에 붙인 사람들. 반응 수를 세고, 다음 알림을 기다리고, 각도와 색과 작은 관심의 신호로 자신의 얼굴을 만들어 가는 사람들. 조금씩 자기 삶을 진열장으로 바꾸고, 끝내 그것을 관계라고 부르는 사람들.

그렇다면 이 곡은 소셜미디어나 스마트폰, 혹은 현실 감각을 잃어버렸다고 흔히 비난하는 시대를 겨냥한 또 하나의 노래로 끝날 수도 있다.

하지만 Grand sommeil은 조금 더 멀리 간다.

사실 화면 자체가 진짜 주제는 아니기 때문이다. 화면은 더 오래되고 더 인간적인 무언가가 드러나는 장소일 뿐이다. 바라봐 주기를 바라는 마음, 인정받고 싶고 승인받고 싶고,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인받고 싶은 마음.

바로 그 지점부터 이 노래는 아프기 시작한다.

Grand sommeil, 이 ‘깊은 잠’은 단순히 화면 앞에서 너무 많은 시간을 보내는 일이 아니다. 신호와 실체를 혼동하게 되는 순간이다. 반응과 관계를, 시선의 숫자와 정말로 누군가에게 보이는 일을 혼동하는 순간이다. 자신의 이미지를 너무 치밀하게 만들어서, 그 이미지가 무엇을 지키는지 — 무엇을 숨기는지조차 잘 모르게 되는 순간이다.

노래 속에서 모든 것은 점점 숫자와 포즈, 조회와 알림으로 바뀐다.

얼굴마저 상품이 된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거울 속에서 웃는 법을 배운다. 빛을 조절하고, 무엇을 보여 줄지 고르고, 튀어나오는 부분을 지운다. 그리고 이 버전의 내가 제대로 전달되었다는 작은 신호를 기다린다.

그동안 어딘가에서는 무언가가 잠들 수 있다.

그래서 후렴은 거의 모순처럼 들리는 문장을 반복한다. “Le grand sommeil, c’est ça le réveil.” — ‘그 깊은 잠, 그게 바로 깨어남이다.’

모든 것이 깨어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움직이고, 번쩍이고, 반응한다. 이미지가 흘러가고, 메시지가 도착하고, 숫자가 오르내린다. 끊임없이 무언가가 일어난다.

하지만 움직임이 곧 삶은 아니다.

소음이 곧 존재감은 아니다.

그리고 보인다는 것이 반드시 누군가를 만난다는 뜻도 아니다.

아마 가장 흥미로운 순간은 이 노래가 더 이상 그들만을 말하지 않을 때 찾아온다.

처음에는 그들이다. 그들은 더 이상 볼 것이 없고, 할 말도 없다. 하트와 반응을 센다.

그러다 화면이 꺼진다.

그리고 갑자기: 우리.

우리는 초조해지고, 눈을 내리깔고, 속인다. 필터도 프레임도 없이, 무엇을 봐야 하는지와 자기 자신을 어떻게 봐야 하는지를 계속 알려 주던 작은 중간 장치도 없이 남겨진다.

그 순간 Grand sommeil은 듣는 사람에게 더 이상 편안한 노래가 아니다.

Le Pavé가 더 이상 멀리 떨어진 우스꽝스러운 군중을 가리키지 않기 때문이다. 그 손가락을 천천히 우리 쪽으로 돌린다.

질문은 더 이상 그들은 대체 어떻게 된 걸까?가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모든 것을 어떻게 하고 있는가?가 된다.

이 점은 곡의 음악적 색깔도 설명해 준다. 냉소적이고 날카로운 dark ragga는 단순히 가사를 받쳐 주지 않는다. 반복은 거의 최면처럼 변한다. “Dormez, dormez” — “자라, 자라”는 거울의 잘못된 쪽으로 넘어간 자장가처럼 들린다. 인간이 잠들어 가는 동안 기계는 깨어 있다.

그리고 그 문장이 반복될수록 점점 웃을 수 없게 된다.

끝에서 화면은 꺼진다.

프레임도 없다. 숫자도 없다. 유지해야 할 포즈도 없다.

얼굴 하나만 남는다.

그리고 아무것도 쥐고 있지 않은 두 손.

아마 바로 이 지점에서 Grand sommeil은 온전히 Le Pavé의 곡이 된다. 기술 자체를 비난해서가 아니다. 너무 평범해져 이제 거의 보이지 않게 된 습관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을 필요로 하는 마음이 조금씩 ‘다른 사람에게서 오는 신호’를 필요로 하는 마음으로 바뀌는 방식.

Le Pavé가 좋아하는 곳은 바로 이런 지점이다.

일상이 아무렇지 않아 보이다가 표면을 조금 긁는 순간 다른 것이 드러나는 곳.

그리고 이미지 아래에서 무언가가 타기 시작하는 곳.